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벨 1세 (문단 편집) === 즉위 전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Rokotov_paul_1_as_child.jpg|width=500]]}}} || || [[1761년]] 8살 때의 모습 || [[표트르 3세]]와 [[예카테리나 2세]]의 아들로 태어났다. 예카테리나가 바람 피워 낳은 아들이라는 [[카더라]]가 있으나 별 근거는 없다.[* 무엇보다 아버지와 생김새와 성격이 비슷하고, [[표트르 3세]]가 지능이 떨어져도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볼 정도로 백치는 아니었다. 옐리자베타 역시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고. 물론 옐리자베타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예카테리나 2세는 [[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|미래의 폴란드 왕]]을 비롯한 여러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고는 했으나 현재는 많은 이들이 후대에 [[예카테리나 2세]]가 여러 남[[첩]]을 두고 문란한 것을 두고 공격하여 생긴 [[카더라]]로 본다.]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[[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]] 밑에서 자라났다. 아버지 [[표트르 3세]]가 어머니 [[예카테리나 2세]]의 쿠데타로 폐위당한 후 줄곧 [[황태자]]였으나 실제로는 어머니의 제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있었고, 실제로 [[예카테리나 2세]]의 즉위 초엔 그녀의 정통성을 이유로 여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. 예카테리나는 로마노프 왕조와 무관한 외국인 출신이면서 표트르 3세를 축출했지만 당시 9세였던 파벨이 어리다는 이유로 아들 대신 자신이 직접 황제로 즉위하여 통치했기 때문이다.[* 아들이 멀쩡히 있는데 아내가 제위를 계승한다니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, [[표트르 1세]]의 뒤를 [[예카테리나 1세]]가 뒤를 이은 것과 같은 경우이다. 이는 당시 러시아가 지명 상속제를 택하고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지 법제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. 그래서 러시아 귀족들도 아직까지 지명 상속제를 유지하고 있는 자기네가 미개하다면서 자조했을 정도.] 파벨은 애초에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성장했다. 옐리자베타 여제가 파벨이 태어나자마자 예카테리나가 아이를 볼 틈도 없이 안고 나간 후 자기가 독점해 길렀고 예카테리나와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. 정치적 입장도 미묘해서 생모와 불편한 관계였지만 [[예카테리나 2세]]도 낳은 정이 있기 때문에[* 게다가 6~8살 시점에선 옐리자베타 여제가 오늘내일하던 상태였고, 실제로 파벨이 8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예카테리나 2세와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.] 아들과의 관계회복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. 유일한 적자 파벨을 위해 며느리 간택 때 미모를 고려하여 아들과 함께 직접 간택했고, 많은 자금을 하사하여 저택과 취미 생활이던 [[밀덕]]질에 돈을 펑펑 쓰게 해주었다. 그러나 결정적으로 모자 관계에 타격을 준 건 '''[[푸가초프]]의 난'''이었다. 3여년의 반란으로 남러시아를 초토화시킨 이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 푸가초프가 자신을 표트르 3세라고 사칭하며 파벨의 옹립을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. 이 때문에 모자 사이는 서먹해졌고 이들을 이간질하려는 여러 야심가들이 카더라 통신을 배포하면서 험악해졌다. 더군다나 이런 [[카더라]] 때문에 예카테리나는 아들의 정사 개입을 원천 차단하고 [[가치나]]를 주어 거의 쫓아냈고, 파벨은 수도에서 떨어져 나와 정사에서도 배제되자 [[예카테리나 2세]] 치하에 찬밥 신세였던 신하들을 측근으로 삼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